추상화된 세계에서 잊은 물리적 감각
우리는 기호에 기대어 산다. 집은 벽을 쳤다고 자신의 것이 되는 게 아니라 등기부와 계약서가 있기에 주인이 생기고, 돈은 은행 장부의 숫자로 존재한다. 내가 무엇을 소유하고 어디에 접근할 수 있는지는 대부분 종이, 숫자, 토큰, 인터페이스 위에 적힌다.
그 기호들이 단지 기호에 그치지 않는 이유는 뒤에 추상적 힘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등기부는 소유권을 인정하는 법적 믿음 위에서, 은행 장부는 금융 시스템에 대한 신뢰 위에서 작동한다. 한국에서 평범한 시스템 안에 사는 나는 누군가와 몸으로 부딪혀 내 것을 지킬 일이 거의 없다. 물론 예전에 대전에서 자취할 때, 가끔 벤틀리를 탄 달건이들을 본 적은 있으나 그 누구보다 빠르게 토꼈기에 불편한 상황을 예방할 수 있었다. 대신 매일 같이 본인인증, 결제 승인, 검색 순위, 추천 피드, 문서 접근 권한 같은 추상적 힘의 결정을 따른다.
그러나 막상 집 밖을 나와 헬스장에 갈 때면 몸이 천근만근한 것이 ‘아, 나는 아직 물리 세계에 갇혀 있구나’ 싶다.
추상화가 너무 매끄럽게 작동하면 우리는 그 아래에 놓인 물리적 감각을 잊곤 한다. 그러나 잊었다고 해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서버는 전기를 먹고 장부는 저장장치 위에 있으며 계약은 마지막에는 누군가의 집행력을 필요로 한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어떤 선을 유지하는 일과 닿아 있다. 어느 장치에 접근할 수 있는지, 어느 장부를 고칠 수 있는지, 어느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가르는 선. 물리 세계에서 소유와 접근은 결국 경계의 문제로 돌아온다.

그렇다면 가장 처음의 물리적인 경계는 무엇이었을까. 인간의 기호와 제도를 모두 걷어낸, 생명이 세계에 처음 그은 선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그것은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계약하는 일이 아니라 세포막으로 안과 밖을 나누고 자신의 부피를 확보하며 주변을 밀어내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소프트워(Softwar)
대학교 1학년 이후로 원래 별로 친하지도 않던 생물과의 관계에 완전한 담을 쌓았음에도 굳이 세포막 같은 것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작년에 흥미롭게 읽은 논문인 제이슨 로워리(Jason P. Lowery)의 <소프트워(Softwar)> 때문이다. 원제는 Softwar: A Novel Theory on Power Projection and the National Strategic Significance of Bitcoin이다. 한국어로 옮기면 대략 <소프트워: 힘의 투사에 대한 새로운 이론과 비트코인의 국가 전략적 중요성> 정도가 될 것 같다.
이 논문에서 비트코인의 핵심 장치는 작업증명(Proof-of-Work)이다. 작업증명은 장부를 바꾸려는 사람이 실제 계산 비용과 전기 비용을 치렀음을 보이는 방식이고 비트코인에서 새 블록이 어떤 기준으로 받아들여지는지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로워리는 여기서 해시나 채굴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먼저 생명이 어떻게 자기 자리를 만들고 지켰는지로 돌아가고 그 예로 세포막을 든다. 안과 밖을 나누고 주변을 밀어내던 작은 막은 힘의 투사, 즉 무엇인가를 지키기 위해 변화를 일으키는 쪽에 비용을 치르게 하는 능력을 설명하는 첫 예시가 된다.
세포막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작업증명으로 이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이 논문은 비트코인을 화폐나 투자 자산으로만 보지 않는다. 로워리는 비트코인을 디지털 세계에서 물리적 비용을 부과하는 힘의 투사 기술로 읽는다. 이 관점이 흥미로운 이유는 비트코인을 둘러싼 익숙한 질문을 바꿔버리기 때문이다. 비트코인이 좋은 돈인지 나쁜 돈인지 투기인지 저장 수단인지도 중요하지만 로워리가 던지는 질문은 조금 다르다. 디지털 세계에서 물리적 힘은 무엇인가. 그리고 작업증명은 사이버 공간에서 어떤 종류의 방어 도구가 될 수 있는가.
이 글을 쓰는 이유
이 논문은 책으로도 출간되었는데 주요 서점에 한글 번역본이 출간되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영어 원문, 한 비트코인 커뮤니티에서 돌아다니던 번역본, 그리고 클로드 선생님과 함께 이 논문을 다시 꼼꼼히 읽어보았다. 책에 있는 내용과 내 생각을 분리하여 적기 위해 노력했지만, 모든 차이를 마크다운으로 표시하기에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모든 노고에 대한 크레딧은 원 논문에게 돌린다.
내가 특히 흥미롭게 느낀 부분은 대부분의 소프트웨어가 컴퓨터를 논리적으로만 제한하는 반면, 비트코인과 같은 어떤 소프트웨어는 연산기기, 즉 하드웨어를 물리적으로 제한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적대적인 행위자에게 심각한 물리적 비용을 부과하고, 그리하여 적대적인 행위를 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드는 소프트웨어. 쫌쫌따리 아키텍처 전공 대학원생으로서는 이 지점이 너무 신기했다. 로워리가 열어젖힌 새로운 가능성을 따라가며, 그가 말한 가치가 어떤 방향으로 실행될 수 있을지 하나의 가능성을 생각해보고 싶었다.
앞으로의 흐름
논문 전체를 그대로 따라가기에는 내용이 너무 많아서 내가 이해한 문제의식의 순서대로 이야기를 정리하기로 했다.
- 자연 발생: 생명은 어떻게 경계를 만들고 자원을 지키는가
- 전쟁과 추상적 권력: 인간은 힘을 법, 국가, 소프트웨어로 어떻게 추상화했는가
- 비트코인: 작업증명은 디지털 세계에 어떤 물리적 비용을 다시 가져오는가
그리고 마지막에는 공개적으로 확인된 미 국방부의 비트코인 노드 운영 발언을 짚어보려 한다. 이것이 로워리의 주장을 입증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적어도 비트코인을 화폐 시스템이 아니라 전자-사이버 보안 시스템으로 보라는 제안이 더 이상 순수한 사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신호로는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고치는 2026년 6월의 비트코인 가격은 전고점 대비 거의 반토막이 났다. 가격표는 축 처진 와중에도 그 안에 내재된 물리적 힘과 오히려 점점 커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과연…?)